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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valuation/한국사(Korea history)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작. 외세의 침략과 접근과 개항

by 지혜로운이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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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naver image / 흥선대원군

1.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1863~1873)

 

■ 통치체제 재정비

㉮ 전제왕권강화

 ·인사정책 : 세도가문 타파 /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 종친 등용

 ·경복궁 중건 : 원납전 징수 / 당백전 남발 →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킴

 

㉯정치개혁

 ·비변사 축소 및 격하 :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의 기능 부활

   비변사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임진왜란 당시 자료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법전 편찬(대전회통/육전조례)

 ·수군 강화 : 서양세력 출몰과 침략

              ⓐ제너럴셔먼호 사건/병인박해(천주교인들을 박해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사형에 의해 프랑스 함대 출현)

              ⓑ병인양요(1866年)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年)
                 (흥선대원군 아버지 묘지에 있는 물건들을 도굴하는 사건 / 유교사상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사건)

              ⓓ신미양요(1871年) - 척화비를 건립하게 됨<통상수교거부정책 실시>

 

㉰민생안정

 ·삼정의 문란 시정 : 전정(양전 실시) / 군정(호포제 실시) / 환곡(사창제 실시)

 ·서원 정리 : 양반의 횡포 방지 / 국가재정 확충


■개혁정치의 의의와 한계

㉮의의 : 국가 기강을 확립 및 왕권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

㉯한계 : 조선 왕조 통치체제 유지와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한 전통 체제 안에서의 개혁이었다는 점.

필자는 한계에 더 초점을 맞추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세계적인 열강들의 식민정책 및 개항 등 어떠한 이유로 인한 것인지 전혀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흥선대원군에 대한 필자의 평가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가문에 의한 왕권이 약화되어 양반 가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정치형태를 바로 잡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사실에 있어서 긍정적인 평가를 볼 수 있다. 다만, 세도정치로 인하여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의 안정을 먼저 되찾기보다는 왕권강화라는 수단의 하나로 경복궁을 재건함으로써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백성들보다는 세도정치 가문과 같은 왕권강화를 먼저 생각을 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박한 평가를 내려주고 싶다. 

 

 이는 세계열강들의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화시키는 식민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 세계 흐름에 어두웠던 부분 또한 있다. 인접국가였던 청나라 또한 서양 세력에 의해 난징조약 및 베이징 조약으로 개항을 실시하였고, 일본 또한 미·일 화친조약을 통해 개항을 하였으며, 추후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반영을 하는 데 있어 세계적인 트렌드가 어떠한 것인지 쫓아가지 못하는 실정들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이 외교적으로 무능함을 보여주며, 조선이라는 국가는 모든 기관들이 현저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조선은 왕권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고종을 위하여 왕권 강화가 우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으며, 조선 왕실의 위엄을 다시 회복하는 뜻에 있어서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은 없다고 생각은 하나, 백성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왕권강화의 단 하나의 모습만 보여주었다는 것에 흥선대원군의 고지식함을 비롯해 사대주의 속에 청나라가 어쩔 수 없이 개항하는 사건들을 보았을 것인데, 세상의 흐름을 보는 눈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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