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독립운동자금 어떻게 모였는가?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함으로써 한국의 역사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언 우리 선조들의 활동 내용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 Toss'에서 좋은취지의 내용을 공유해 봅니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투쟁
독립을 위한 투쟁과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였는데, 이 '돈'의 목적은 무기 구입, 조직 운영,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활동 지원 등을 위해 자금이 무척 중요하였고, 이 독립운동자금을 위해 자발적 모금활동부터, 현금을 실은 일본 마차 습격, 자금 마련을 위한 선조들의 투쟁에 대한 역사를 지금 시작합니다.
현금을 싣고 달리는 마차 습격,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
위의 사진은 독립기념관 출처된 사진으로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의 주역인 선조 사진이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방법 중 보편적인 것이었던 현금 마차 습격인데, 이는 우편을 통해 돈을 옮기던 일이 흔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중 유명한 사건이었던 철혈광복단의 '15만 원 탈취 사건'이다.
1919년, 두만강 유역인 잃어버린 땅 '간도'에서 만들어진 독립운동조직인 철혈광복단은 정보를 하나 입수하게 되는데, 1920년 1월 4일 일제가 조선은행에서 간도까지 15만 원을 수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서 당시 블라디보스톡의 무기시장에서 '소총 한 자루와 탄환 100발'을 세트로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15만 원이면 소총 5천 자루, 탄환 50만 발을 살 수 있었던 큰 돈이었다.
위의 사진에 나온 선조들의 인물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김하서 등 현금을 싣고 가던 마차를 습격해 무장 호송대를 사살하고, 철궤에 담긴 지폐 15만 원을 탈취에 성공해 이들이 뺏은 돈은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고,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의 무력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안타깝게 거사를 도모했던 대부분은 일본군의 끈질긴 추적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모두 처형되었다.
✶북로군정서 :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독립운동 단체
조직적으로 이뤄졌던 여성 모금 활동
우리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의 힘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교육열을 어떠한 나라의 어머니보다도 큰 뜻을 품고 있고 자녀들을 위한 큰 힘을 발휘하는 위대한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본뜻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조선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널리 회원을 모집하여 전국 부녀들이 독립을 위해 전력함이 어떠합니까?" - 매일신보 1919년 12월 9일 기사 중.
일제 강점기, 여성들이 조직한 독립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던 김마리아의 발언이다. 김마리아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에 앞서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중이던 그는 2∙8독립선언문을 몸에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전국의 교회를 방문해 3∙1운동의 열기를 이끌어 내기도 했던 인물이다.
김마리아 뿐만아니라 3∙1운동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5월부터 약 3개월 간 이들은 회비로 747원을 모금해 300원 정도를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는데, 당시 미곡 1석에 45원 정도였으니 300원이면 쌀가마 7석에 달하는 크지 않은 금액이기도 했다.
애국부인회는 조직을 정비 모금에 힘쓴 결과 같은 해인 11월에 군자금으로 2천 원 보낼 수 있었고, 일제의 엄중한 감시가 있었음에도 불구 뜻을 지닌 여성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2∙8독립선언 :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
고된 노동으로 독립을 위한 자금 마련. -대한인국민회-
타국으로 떠난 교민들도 힘을 보탰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미주 지역의 교민들이 보여준 꾸준한 모금 활동이다. 1920년대 기준, 하와이 / 샌프란시스코 등 미주 지역에는 약 1만에 달하는 교민들이 살고 있었고,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떠나 미주에서 고단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대한인국민회' 같은 단체를 조직해 해방 직전까지 독립운동사의 가장 든든한 자금 후원처가 되었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 5천 달러 정도다. 이 금액은 오늘날 18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하는 등 이익을 거두어 약 2만 2천 달러를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사용되었고, 대한부인구제회는 1920-30년 기간 동안 만주 일대의 독립군 세력과 임시정부에 약 20만 달러를 후원, 북미대한인국민회는 1940년대 충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4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가난을 피해 낯선 땅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이렇게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힘을 써준 대한민국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여 주셨다. 독립운동은 결국 돈의 가치를 증명한 싸움이었는데, 사람들이 땀 흘려 번 돈,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모인 독립자금이 마땅히 오늘 우리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싸움 중 하나였다.
3∙1 운동의 중심이었던 종교계
독립운동자금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주체가 바로 '종교계'다. 당시 천도교인 동학농민운동을 계승해 전국적으로 퍼진 종교였다.
천도교는 3대 교조 손병희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 1918년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지을 목적으로 100만 원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건물을 짓는 데는 27만 원, 나머지 자금은 3∙1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에 사용되었다 한다. 중앙대교당은 오늘날 오늘날 인사동에 여전히 남아있다.
천도교는 전국적으로 농민을 기반으로 한 반면, 개신교는 주로 평안도에 밀집해 있었고 자금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개신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은 천도교 3대 교조 손병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3∙1운동 위한 자금 지원에 손병희는 5천 원을 지원했다. 이 돈은 오롯이 민족대표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여행 경비, 독립선언문 배포 비용 등에 쓰였고, 이후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잡혀들어간 이들의 가족 생계비로도 쓰였다.
참고자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미주지역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4
3.1여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가>, 국학자료원, 2018.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2004.
박환,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국학자료원. 2012.
심용환 ,<단박에 한국사, 근대편>, 2016.
-토스 &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오늘 광복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자금 마련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고, 이에 토스 &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가 함께 만든 이 내용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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