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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Bible/성경의 이해

성경인문학, 이스라엘 역사 읽어보기!!

by 지혜로운이 202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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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성경인문학의 Lazarus Kong(공준성 나자로)입니다. 오늘 성경인문학 코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하고자 글을 남겨놓는데요. 이와 같이 보시면 쉬울 것 같아 단락을 나누어 이야기해보겠어요.

  1. 이스라엘의 기원
  2.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
  3. 왕정제도
  4. 유다 공동체

이스라엘 국기


1. 이스라엘의 기원

 기원사는 대부분 다른 민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규명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 이전, 형성의 시대가 앞섰을 것이나 역사가들의 접근을 벗어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셈족 가운데 반유목민으로서, 기원전 2000년대 내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반사막 지역 주변에서 양 떼를 치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반유목민들은 점차 몇몇 집단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때로는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반유목민 집단 가운데 후에 아모리인들과 아람인들의 시조가 된 두 집단이 잘 알려져 있는데, 아모리인들의 BC 2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정착했으며, 아람인들은 BC13세기경, 시리아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들은 또 다른 여러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과 이집트에 끊임없이 잠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 이스라엘 지파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의 시대를 자리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전승이 이들 성조들의 것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역사적 가치를 판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며, 사실 성경 저자들은 성조들의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기보단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적인 선조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 구약성경 주석

2.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

 추측하건대, BC13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과정으로(기원전 1225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네프타의 기념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티나의 소수 주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집단과, 이집트에 정착해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탈출한 셈족 집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모세는 셈족 집단을 가나안을 향하여 이끌어 갔다 하며 성경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이 집단에게 주님께 올려야 할 경례를 가르치며, 이 집단을 하나의 백성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은 이들 기본적인 사건들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사건들을 이스라엘의 출생증명서로,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으로 소개했다.

 모세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느보 산에서 죽자 여호수아가 이 집단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간다. 여러 지파로 구성된 한 백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으며, 지파 연맹은, 그 시작은 잘 알 수 없어도,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 동안 이루어지거나, 해양 민족 특히 기원전 12세기 초 팔레스티나 해안에 상륙한 필리스티아인들의 출현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영토를 넓힐 목적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이 살고 있던 고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들 지파들은 이웃 민족들의 제도를 본받아 임금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지파 연맹을 강화하며 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3. 왕정 제도

 사울의 왕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투 중에 사울 임금이 죽자, 유다 지파의 다윗이 점차 모든 지파의 인정을 받아, 먼저 유다의 임금으로, 이어서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즉위한다. 수도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다음 다윗은 인접한 왕국들, 특히 요르단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향하여 세력을 펼쳐 나간다. 그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와서 왕국은 체제를 더욱 정비하며, 솔로몬 치세에 관한 기록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건축만큼은 관심을 가질만하다. 이스라엘은 이 성전에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머무르시는 주님의 항구 한 현존에 대한 표징을 본다. 그러나 솔로몬 치세 종말은 적대 세력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지며,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하브암은 이스라엘 왕국이 표면상으로만 통일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적대 세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북쪽 지파들은 르하브암 임금이 조세 감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게 되며 기원전 933년 반기를 들어 독립된 왕국을 건설, 곧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다.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남으로는 유다와 벤야민 지파만이 르하브암을 섬기며 유다 왕국을 유지하며 대치하게 된다. 이후 2세기 동안 두 왕국은 때로는 대립도 하며, 공존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더 풍요롭고 더 많은 주민이 살던 지역들로 형성된 북 왕국은 특히 사마리아 도성을 창건한 오므리 임금과(BC886~875), 그의 뒤를 이은 아합과(BC875~853), 예로보암 2세(BC787~747) 당시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였지만 만성적인 왕조의 불안으로 쇠약해지는 길을 걸으며 아시리아의 세력 확대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결국 BC737년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 에세르 3세에 굴복하고, 이후 BC722년 사마리아 함락과 함께 멸망을 맞이한다.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유배지로 압송되고 왕국의 영토는 아시리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게 된다.

 북 왕국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경제적으로도 빈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왕국들과 이웃해 있던 유다 왕국은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이집트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이 왕국은 그래도 아사와 여호사팟, 특히 기원전 727년 사마리아 함락 이후 북 왕국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던 히즈키야와, 유다가 독립에 대한 마지막 의지를 불태웠던 요시야와 같은 임금들의 시대에 와서는 이민족들 사이에서 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 유다 왕국 역시 북의 이스라엘 왕국 멸망한 후 한 세기가 조금 지나 무너져 내리며 멸망하게 된다.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도성을 파괴하고 주민 가운데 일부를 유배지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BC587)

 바빌론으로 흩어졌거나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옛 주민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과 동화되어 살아갔으나, 몇몇 소규모 집단들은 성전이 멀리 떨어져 있고 더 이상 제사를 바칠 수 없게 되었어도 종교적으로 생활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응집력을 견지해 나갈 줄 알았다. 이는 유배 생활은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징벌의 이유에 대해 깊이 있게 반성하고 근래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성경의 여러 본문들이 이를 반항하기 시작한다.


유대인

4. 유다 공동체

 유다 왕국이 몰락한 지 오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상황은 다시 바뀌어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국이 붕괴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은 일찌감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 후, 이 성전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다시 모여든다. 아직 미흡하였지만 이 공동체는 수많은 난제들을 극복해 성장하였다. 우선적으로 그 땅에 남아 있었던 잔류민들의 적대감에 직면도 하였으나, 이 공동체는 BC5세기에 이르러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업적으로 분명한 조직을 갖추었으며, 정치적 차원에서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긴 하나 종교와 관련하여 깊이 있는 흔적을 남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이 시기부터 구약 성경의 대부분이 결정적인 형태를 갖게 된다.

 BC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종결시키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의 승리를 보장한다. 마케도니아 제국에 병합된 이스라엘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사이에 전개될 충돌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한 세기 반 동안 유다 공동체는 그리스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나 BC167년에 이르러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의 특별한 지위를 박탈했으며,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종교의식에 대한 금지령을 선포한다. 이에 마카베오 형제들은 무력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사제로 인정받은 시몬 마카베오가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BC142년),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시몬의 자손들은 곧 임금으로 불리던 하스몬가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유지하였으나, BC63년 로마인들이 이 상황을 끝낸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다를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이 시기 동안 유다 공동체는 스켐 성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전통과 대립되는 지파들의 전통을 물려받은 사마리아인들과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과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제국의 침입으로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기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기원전 538년 이후 유다로 귀환하지 않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그리스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근동 전역과 지중해 연안, 특히 이집트를 향한 이주가 수월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다보다 더 많은 유다인들이 살았으며, 이들의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유다교에 많은 개종자들, 곧 '새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외국에 거주하던 이 모든 유다인들은 디아스포라(분산)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그 절반인 유다인들이 아니었던 팔레스티나의 인구보다 많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보였던 이들 유다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함께 살고 있던 다른 민족들의 삶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유다교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도록 이끌었으며, 기원 후 70년에 있었던 큰 시련을 극복하도록 준비시키기도 하였다. 이 시련은 로마인들을 거슬러 일으킨 유다 항쟁을 말하며, 이 전쟁은 성전 파괴로 끝났고, 바르 코크바의 최후 저항(135년) 이후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거주 자체가 금지되었다.


자, 여기까지 오늘의 성경 인문학의 주제였던 이스라엘의 역사들을 정리해보았는데요. 성경 공부를 하신 분들이 성경을 읽기 전에 좀 더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고자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모든 역사적인 흐름. 특히 이스라엘의 사람들(유다인) 그들이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내용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의 뿌리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역할인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새 신자들'이 모여들며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지배력을 엿볼 수 있었네요. 

 

[참고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구약성경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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